아무 일은 하든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돈까지 벌린다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사람은 천직이라고 생각하던 일까지를 버리고 살자면 사는 것이고 그러면서 행복할 수조차 있다.- 그렇게 결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람이 취미라는 것은 그저 그만한 것이었다

문 밖이 지옥이다. 산다는게 칠성판 짚고 헤엄치기지.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잊고 산다. 그러다가 누구나 눈을 감을 수 없이 바라보아야 하는 지옥을 보고 칠성판을 등에 느껴야 할 때를 만난다. 그 영화는 사실인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고 나이 먹다가 마침내 더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눈을 감지않고 배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캄캄한 밤에는 불빛이 가깝게 보인다. 그 작은 불빛이 그렇게 큰 희망으로 보이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어둠의 깊이를 말해준다.

...(중략)...나중에는 그가 자기를 부인한 심정을 알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사람이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이전의 자기를 자기가 아니었다고 인식하게 된다. 한 사람에 몸뚱아리가 하나씩 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불행의 뿌리였다. 다른 자기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몸의 일부인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 그런데 그 몸은 지금 다른 마음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예전의 마음을 섬길 수 없다는 것.

미국행정서류란에는 <아시안>이라는 인종분류는 없고 <오리엔탈>이라고 쓰기로 되어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엉뚱한 분류같지만 다른 기준에서 봐서 맞는 말이다. 오리엔탈은 특수개념이자 보편개념으로도 쓰고 있다는 말이다. 유럽 사라마 아닌 지중해 동쪽의 모든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로마사람들이 이방인을 구별없이 <바르바로사>라고 부른 것처럼, 중국사람들이 이방인을 모두 <夷)라고 부른 것처럼. 미국의 전국지의 국제면을 보면 역사의 반복이 실감된다. 그리고 비로서 실상이 보인다. 이 실상을 귀에 부드럽게 표현하는 기술이 이 사람들의 지성의 근본적인 흐름이라는 것도 보인다. 신문처럼 그 점을 잘 드러내는 분야는 따로 적수를 찾아보기 어렵다. 작은 나라의 지도자를 다룰 때의 놀리는 듯한 투. 자기들 것이 아닌 사고방식을 다룰 때의 시치미 뗴고 끄덕거리는 모습. 다 보인다. 대학에서는 이 수사학이 존더 점잖지만 속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때로는 있는 법이다. 가려내자면 그 짧은 장면 속에서 아귀를 맞춰야 할 부분은 그것말고도 얼마든지 더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그 밖의 여러 부분에 대해서 그때마다 기억이 어긋난다해도 그것들모두보다 더 무거운 양해사항이 우리 사이에는 끈끈하게 이루어져 있다. 나누어 가지고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 이렇게 시간을 내서 그 추억을 다시 꾸며본다는 그 사실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잊게 하고 허망한 듯 싶으면서도 다른 것을 가지고 얻을 수 없는 힘을 주는 듯 싶다는 그 사실이었다.

역사에 대해 징징 울어봤자 소용없다. 역사가 아픈 술수로 우리를 때릴 때, 맞은 바에는 아픔을 잊지 말자. 다음에는 맞지 말기 위해서. 잘하면 다음에는 때리는 쪽이 되기 위해서.

-잘 안다는 것, 잘 파악한다는 것, 잘 표현한다는 것을 편의상 같이 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쓰는 사람의 머리속에서 구별이 되있는 것이 필요하다.

한 제국의 개혁에 착수하는 사람이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한 본질적인 예측이 없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다. 아니면 무능한 사람이다.

자연은 그렇다. 기회를 가지지못한 생명에 대하여 아랑곳 없다. 1%를 위해 존재한 99%를 대하여 자연은 일체 감정적 앙금을 만들지 않는다.

2009/08/31 20:32 2009/08/3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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